동제당 최원장의 溯源齋

鄙薄貪懦는 누구의 것인가 — 굳은 局과 心地의 봉쇄

· 최장혁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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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行篇 × 壽世保元 「局·面·局回」 三部作 · 第一部 〔局 — 선 자리〕

들어가며

이제마(李濟馬)의 인간론에서 鄙薄貪懦(비박탐나)는 흔히 네 종류의 못난 인간, 곧 我와 구별되는 별종(別種)의 타인으로 읽힌다. 그러나 이 독법은 『격치고(格致藁)』가 鄙薄貪懦를 세워 둔 자리를 놓친다. 鄙薄貪懦는 별종의 악인이 아니라 자기가 본래 취약한 德마저 스스로 버린(棄) 자의 이름이며, 心地의 淸濁이 탁(濁)으로 기운 만인(萬人)의 한 가능성이다. 그리고 그 본질은 욕망의 크기가 아니라, 자기 심지(心地)조차 밝게 보지 못하는 인식론적 봉쇄에 있다. 본고가 〔局〕의 자리에서 밝히려는 것이 이것이다.

분석축은 局場面 유체론이다. 만남 이전부터 각자의 몸에 능동적 형세로 서 있는 局, 두 局이 부딪혀 생기는 관계 공간 場, 두 局이 실제로 맞닿는 접촉막 面 — 이 세 층위 가운데 場과 그 안의 살핌(察, 眼孔)은 앞선 두 논문에서 이미 다루었으므로(최장혁, 場役配定 ; 최장혁, 眼孔), 본 시리즈는 場을 비축(非軸)으로 접어 두고 局과 그 局이 만드는 面만을 본다. 출발은 첫 자리, 局이 선 안쪽이다. 한 사람 안에서 鄙薄貪懦가 무엇인지를 먼저 묻는다.

다만 局과 面은 끊어 나눌 수 없다. 面은 독립된 영역이 아니라 굳은 局의 발현이며, 뒤에 보겠듯 鄙薄貪懦의 정의 자체가 이미 관계어(關係語)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 시리즈는 局·面·局回를 단계로 토막 내지 않고, 하나의 굳은 局=面을 세 자리에서 차례로 비추는 한 바퀴로 짠다. 제1부는 그 바퀴의 첫 자리다.

1. 무엇을 버린 자인가 — 鄙薄貪懦의 정의

鄙薄貪懦를 읽는 일은 한 글자에서 갈린다. 사단론(四端論)은 이렇게 적는다.

人趁心慾有四不同 棄禮而放縱者名曰鄙人 棄義而偸逸者名曰懦人 棄智而飾私者名曰薄人 棄仁而極慾者名曰貪人

그 글자는 棄(버릴 기)다. 鄙人은 禮가 없는 자가 아니라 禮를 버리고 방종한 자이며, 貪人은 仁이 모자란 자가 아니라 仁을 버리고 욕심을 다한 자다. 결여(缺如)가 아니라 능동적 포기다. 鄙薄貪懦는 애초에 가지지 못한 자가 아니라, 가졌던 것을 스스로 버린 자다.

사상의학초본권은 여기에 체질을 못 박는다 — 鄙는 太陽人, 懦는 少陰人, 薄는 少陽人, 貪은 太陰人이다(『初本卷』). 그리고 버려진 德은 임의의 것이 아니다. 太陽人이 버린 禮, 少陰人이 버린 義, 少陽人이 버린 智, 太陰人이 버린 仁은 각 체질이 본래 취약하게 타고나 마땅히 닦아야 할 德이다. 鄙薄貪懦란 곧 자기에게 본래 가장 부족한 德마저 버린 자의 이름이다.

가장 먼저 저술된 독행편(獨行篇)은 그 버림이 향하는 마음의 무한성을 적는다. 鄙者의 慾心은 싫증이 없고(無厭), 薄者의 私心은 다함이 없으며(無窮), 貪者의 放心은 끝이 없고(無極), 懦者의 佚心은 쉼이 없다(無歇). 배영순(裵英淳, 2012)은 衆人을 本性을 저버린 자로, 鄙·薄·貪·懦를 각각 권세·명예·재물·지위를 향한 편향으로 정리하면서, 이 인간론이 사상의학을 체질의학으로만 좁혀 읽는 통념의 반쪽을 드러낸다고 본다 — 사상의학은 체질의 의학이기 이전에 인간의 유형론이라는 것이다.

2. 별종이 아니라 탁(濁)의 극단 — 心地의 淸濁

그렇다면 이 버린 자는 나와 종류가 다른 인간인가. 사단론은 분명히 아니라고 답한다.

太少陰陽之臟局短長四不同中有一大同天理之變化也 聖人與衆人一同也 鄙薄貪懦之心地淸濁四不同中有萬不同人欲之濶狹也 聖人與衆人萬殊也

臟局의 短長(체질 구조)에는 네 다름 속에 하나의 큰 같음(一大同)이 있어 성인과 중인이 한가지이고(一同), 心地의 淸濁에는 네 다름 속에 만 가지 다름(萬不同)이 있어 성인과 중인이 만 갈래로 갈린다(萬殊). 두 축의 성격이 다르다는 데 핵심이 있다. 臟局短長은 천품(天稟)으로 불변하지만, 心地淸濁은 인욕(人欲)의 넓고 좁음으로 가변한다.

이제마는 그 가변성의 책임 소재를 재능이 아니라 마음에 둔다. 천하 중인의 臟理와 才能이 모두 성인의 그것과 같은데도 “나는 재능이 없다” 한다면, 그것은 재능의 죄가 아니라 마음의 죄(心之罪)다. 따라서 鄙薄貪懦는 별종의 장부에서도, 별종의 재능에서도 오지 않는다. 그것은 心地 淸濁이라는 하나의 스펙트럼 위에서 탁으로 치우친 극단일 뿐이며, 그 스펙트럼은 모든 사람이 함께 선 자리다. 종류가 다른 것이 아니라 정도가 다르다 — 鄙薄貪懦가 만인의 가능성인 첫 번째 근거가 여기 있다.

이 가변성을 이제마는 두 출처로 구조화한다.

浩然之氣出於肺脾肝腎也 浩然之理出於心也

仁義禮智 네 장부의 기운을 확충(擴充)하면 浩然之氣가 장부에서 나오고, 鄙薄貪懦라는 한 마음의 욕망을 밝게 분별(明而辨之)하면 浩然之理가 마음에서 나온다. 鄙薄貪懦의 문제는 장부가 아니라 마음의 차원이며, 그 해법 또한 장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한 마음의 욕망을 밝게 보는 데 있다. 이 「明而辨之」가 뒤에서 봉쇄를 푸는 열쇠가 된다.

3. 局은 어떻게 굳는가 — 邪心과 怠心

心地가 탁으로 기우는 것은 어떤 기제로 일어나는가. 유체론의 언어로는, 본래 흐르던 局이 어떻게 고체로 굳는가를 묻는 일이다. 성명론(性命論)은 인간을 네 층위로 나누고 아래 두 층을 각각 知와 行의 자리로 둔다. 頷臆臍腹은 앎을 행하는 곳으로 두루 통함(博通)을 향하고, 頭肩腰臀은 행함을 행하는 곳으로 홀로 바로 감(正行·獨行)을 향한다. 그리고 두 자리에는 각각 그것을 무너뜨리는 마음이 도사린다.

人之頷臆臍腹邪心無雙也 人之頭肩腰臀怠心無雙也

頷臆臍腹에는 驕·矜·伐·夸의 邪心이, 頭肩腰臀에는 奪·侈·懶·竊의 怠心이 짝 없이 들어 있다. 이 두 마음이 본래의 능력을 무너뜨리는 방식을 이제마는 정확한 대구로 적는다.

頷臆臍腹之中 自有不息之知 如切如磋 而 驕矜伐夸之私心卒然敗之 則自棄其知而不能博通也 頭肩腰臀之下 自有不息之行 赫兮晅兮 而 奪侈懶竊之慾心卒然陷之 則自棄其行而不能正行也

끊임없는 앎(不息之知)이 邪心에 무너져 스스로 그 앎을 버리니(自棄其知) 두루 통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행(不息之行)이 怠心에 무너져 스스로 그 행을 버리니(自棄其行) 바로 행하지 못한다. 여기서도 결정적 동사는 다시 棄다. 局은 무엇을 빼앗겨 굳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려 굳는다. §1에서 德을 버린 그 손이, 여기서는 자기의 앎과 행을 버린다. 확충론(擴充論)의 全好 구조 — 한 성정을 온전히 선호하여 다른 쪽이 마르는 흐름 — 가 이 굳음을 가속한다. 흐르던 局이 고체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한 짝을 미리 둔다. 독행편이 鄙薄貪懦를 忠信廉解와 짝지어 互爲(호위)로 적는 것은, 둘이 별개의 인물이 아니라 한 局의 두 상태이기 때문이다. 풀려 흐르면 충신염해, 굳어 멈추면 비박탐나 — 같은 局이 어디로 굳느냐의 문제다. 굳은 局이 풀린 局을 어떻게 치는가, 그 互爲의 실제는 〔面〕의 몫이다.

4. 본질 — 자기 심지조차 보지 못함

이제 본질을 묻는다. 鄙薄貪懦의 핵심은 욕망의 크기인가. 아니다. 핵심은 그 욕망을 보지 못하는 봉쇄다. 유략(儒略)은 네 마음이 인식을 가리는 방식을 4중 대응으로 적는다.

私心昧也 慾心闇也 放心窒也 逸心罔也 昧心昧學也 闇心闇辨也 窒心窒問也 罔心罔思也

私心은 어둡고(昧), 慾心은 캄캄하며(闇), 放心은 막히고(窒), 逸心은 그물 같다(罔). 그리고 그 어둠은 차례로 學·辨·問·思를 가린다. 學辨問思는 곧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네 길이니, 鄙薄貪懦의 마음은 앎으로 드는 네 문을 한꺼번에 봉쇄하는 셈이다. 봉쇄의 양상은 한결같이 자기(自己)로 수렴한다 — 천하의 일은 소홀히 보고 제 일만 무겁게 보며, 천하의 사물은 탐하면서 제 것은 하찮게 여기고, 횡행(橫行)을 마음의 쾌(快)로, 자포자기를 몸의 편함으로 삼는다.

결정적인 것은, 이 봉쇄가 바깥만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앞서 浩然之理는 “한 마음의 욕망을 밝게 분별하면(明而辨之) 나온다"고 했다. 그런데 유략이 적은 봉쇄의 한 항목이 바로 그 分別의 봉쇄, 闇辨이다. 곧 鄙薄貪懦者는 자기 심지의 방향도, 자기 욕망의 정체도 밝게 분별하지 못한다. 이것이 鄙薄貪懦의 본질이다. 욕망이 크다는 것이 아니라, 그 욕망을 보는 눈이 그 욕망에 의해 닫혔다는 것. 局이 고체로 굳을 때 가장 먼저 굳는 것은 자기를 보는 시선이다.

닫으며 — 그럼에도 希聖

그러나 봉쇄는 운명이 아니라 상태다. 사단론은 萬殊의 한가운데에 길 하나를 남긴다.

太少陰陽之短長變化一同之中有四偏 聖人所以希天也 鄙薄貪懦之淸濁濶狹萬殊之中有一同 衆人所以希聖也

성인이 천(天)을 희구하듯(希天), 중인은 鄙薄貪懦의 萬殊 가운데 있는 하나의 같음(一同)을 통해 성(聖)을 희구한다(希聖). 萬殊의 끝, 가장 탁한 자리에 선 자에게도 그 문은 닫히지 않는다. 성명론이 거듭 못 박듯, 어리석음을 면하고(免愚) 불초를 면함(免不肖)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在我也).

局은 굳었으되 끝내 닫히지 않았다. 봉쇄는 상태이지 본성이 아니며, 鄙薄貪懦는 별종의 타인이 아니라 본래 취약한 德마저 버린 만인의 한 상태다. 이것이 〔局〕이 선 자리에서 본 鄙薄貪懦의 전모다.

그러나 굳은 局은 혼자 살지 않는다. 그 정의가 棄禮·棄義·棄智·棄仁이라는 관계어인 한, 局이 서는 순간 그것은 반드시 누군가와 맞닿는다. 다음 〔面〕에서는 이 굳은 局이 만드는 접촉막, 곧 局이 서면 반드시 닿고 반드시 치는 자리를 본다.


補論 · 字形의 混同 — 林炳學(2022) 怠心 확정의 한계

본론의 局 논의에서 한 걸음 비켜, 鄙薄貪懦의 체질 배속을 둘러싼 선행연구 한 편을 따로 짚는다. 局 자체의 논지에는 영향을 주지 않으나, 鄙薄貪懦를 다루는 이상 정리하고 넘어갈 매듭이다.

격치고에서 가장 먼저 저술된 독행편은 鄙薄貪懦者의 마음을 이렇게 적는다.

鄙者之事功 懦悝而無禮之奪心 無時無也 懦者之材力 卑劣而無義之僭心 無時無也 貪者之用心 陋醜而不仁之橫心 無時無也 薄者之行身 苛小而不智之驕心 無時無也

鄙者(太陽人)에게는 無禮의 奪心, 懦者(少陰人)에게는 無義의 僭心, 貪者(太陰人)에게는 不仁의 橫心, 薄者(少陽人)에게는 不智의 驕心이 항상 있다는 것이다. 林炳學(2022)은 이 네 마음이 “이후에 확충되어 『東醫壽世保元』의 怠心으로 확정"되었다고 본다. 다만 그 자신도 독행편의 체질 배속(鄙=太陽人 등)이 동의수세보원 怠心의 배속(太陽人은 竊心, 少陽人은 懶心, 少陰人은 奪心, 太陰人은 侈心)과 “차이가 있다"고 단서를 달았다. 본고는 그 차이가 단서에 그치지 않고 발전적 확정 자체를 무너뜨린다고 본다. 근거는 둘이다.

첫째, 字의 대조부터 맞지 않는다. 독행편의 네 글자는 奪·僭·橫·驕인데, 동의수세보원이 정리한 怠心은 奪·侈·懶·竊이고 邪心은 驕·矜·伐·夸다. 독행편의 네 글자를 怠心에 대보면 실제로 들어 있는 것은 奪 하나뿐이다. 懦者의 僭과 貪者의 橫은 怠心에도 邪心에도 없이 아예 사라지고, 薄者의 驕는 怠心이 아니라 邪心에 속한다 — 邪心 驕心은 太陰人의 것이라 독행편의 薄者(少陽人)와도 어긋난다. 유일하게 공유되는 奪조차 체질이 갈리는데, 독행편의 奪은 鄙者(太陽人)의 것이나 怠心의 奪心은 少陰人의 것이다. 이 奪의 어긋남은 사실 林炳學 자신이 짚어 “차이가 있다"고 적은 대목이다. 네 글자 가운데 셋이 怠心에서 사라지고 남은 하나마저 체질이 갈린다면, “독행편의 네 마음이 怠心으로 확정되었다"는 매핑은 글자 차원에서 이미 지탱되지 않는다.

둘째, 같은 奪이라도 가리키는 차원이 다르다. 동의수세보원은 怠心을 頭肩腰臀의 行其行, 곧 獨行(命) 차원에 두고 奪心을 識見과 짝지어 그 타락으로 규정한다 — 기존의 앎을 제 의도대로 끼워맞추고 출처를 숨겨 남의 식견과 명예를 빼앗는 마음이다. 반면 독행편의 奪心은 鄙者의 事功에 깃든 無禮의 奪, 곧 棄禮에서 나오는 奪이다. 앎의 자리에서 식견을 빼앗는 奪과 禮를 버린 자리에서 일을 가로채는 奪은 글자만 같을 뿐 본적이 다르다. 독행편이 鄙者에게 奪心이라 쓴 것은 奪心이라는 글자를 棄禮의 양상에 빌려 온 표기이지, 識見 차원의 奪心이 그대로 鄙者에게 옮겨간 것이 아니다.

요컨대 독행편의 네 마음과 동의수세보원 邪心·怠心의 불일치는 텍스트가 발전하며 정련된 흔적이 아니라, 같은 글자가 서로 다른 차원에 쓰인 字形의 중첩이다. 林炳學은 怠心 배속의 어긋남을 정확히 보고 “차이가 있다"고 적었으나, 그 차이를 단서로만 남긴 채 “발전적 확정"이라는 결론은 그대로 유지했다 — 字形의 동일을 계보와 개념의 동일로 받아들인 것이다. 본고는 그 차이를 발전적 확정을 떠받치는 각주가 아니라 그것을 무너뜨리는 신호로 읽는다. 다만 이는 鄙薄貪懦의 한 배속 처리에 국한된 지적이며, 격치고를 설계도로, 동의수세보원을 완성된 집으로 보는 그의 전체 구도(林炳學, 2022)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선행연구도 이 방향과 닿는다. 尹德泳·高炳熙(1996)는 鄙薄貪懦와 仁義禮智(忠信廉解)의 대응이 독행편·사단론·유략에서 서로 어긋난다고 보고, 仁義禮智 四端을 人間 本性으로 보는 한 그 적용은 時·環境에 따라 달라지므로 고정해 볼 것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세 텍스트의 仁義禮智는 적용 방편이 각기 달라 서로 맞추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며, 太陽人=鄙者 식 체질 배속도 “경향성은 있으나 어긋난다"는 것이다. 배속을 못 박아 계보를 그리는 전제 자체가 재검토 대상임을, 본고는 林炳學(2022)에 28년 앞선 이 지적과 함께 둔다.

참고문헌

  1. 李濟馬, 『格致藁』, 韓斗正 編, 咸興: 德興印刷所, 1940.
  2. 李濟馬, 『東醫壽世保元』(辛丑版).
  3. 李濟馬, 『東醫四象初本卷』.
  4. 裵英淳, 「이제마의 인간론 — 衆人의 유형론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 50,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2, 323–357.
  5. 尹德泳·高炳熙, 「獨行篇에 나타난 鄙薄貪懦者에 대한 考察」, 『사상의학회지』 8(1), 1996, 57–74.
  6. 金芝英·宋一炳·高炳熙, 「知行論에 관하여」, 『사상의학회지』 7(2), 1995.
  7. 李秀璟·高炳熙·宋一炳, 「四象醫學의 형성 과정에 관한 문헌적 고찰」, 『사상의학회지』 10(1), 1998, 41–54.
  8. 林炳學, 「『東醫壽世保元』과 『格致藁』의 상관성 고찰 — 好善·惡惡·邪心·怠心을 중심으로」, 『民族文化』 62, 한국고전번역원, 2022, 261–287.

최장혁 | 한의사 · 동제당한의원 원장 · 연구 방법: DJD 다중 문헌 교차 리서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