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제당 최원장의 溯源齋

鄙薄貪懦는 어디로 돌아오는가 — 局回와 닫히지 않는 局

· 최장혁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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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行篇 × 反誠箴 「局·面·局回」 三部作 · 第三部 〔局回 — 한 바퀴〕

들어가며

제1부는 굳은 局을 그 안쪽에서 보았고, 제2부는 그 局이 다른 局과 맞닿는 面을 보았다. 1부에서 鄙薄貪懦는 욕망이 큰 자가 아니라 자기 심지조차 밝게 보지 못하는 봉쇄(闇辨)의 자였고, 2부에서 그 봉쇄는 面으로 새어 나와 凌·傾·賊·掩의 침탈이 되었다. 그러나 2부는 그 침탈이 한쪽으로만 쌓이지 않는다는 데서 닫혔다 — 맞은편에 益修하는 풀린 局이 서서, 互爲는 어느 한쪽의 완결을 끝내 허락하지 않는다.

본부는 그 互爲가 한 바퀴를 그리는 자리, 곧 局回를 본다. 局場面 유체론에서 局回는 셋째 자리다 — 局이 선 안쪽(1부)도, 두 局이 맞닿는 面(2부)도 아닌, 面에서 주고받은 것이 시간을 따라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국면이다. 1부가 局의 공간을, 2부가 面의 접촉을 보았다면, 3부는 局의 시간을 본다. 본부의 논지는 한 줄로 선다 — 局回의 한 바퀴는 끝내 닫히지 않으며, 그 닫히지 않음이 1부가 열어 둔 “局은 닫히지 않았다"를 마지막으로 회수한다.

1. 局回란 무엇인가

局回가 한 바퀴이려면, 面에서 받은 것이 되돌아갈 길이 있어야 한다. 동무는 그 길을 두 자리에 그려 둔다.

첫째는 반성잠의 도식이다. 반성잠은 易象에 의방해 여덟 잠(乾兌坤艮离震坎巽)을 세우고, 그 방향을 둘로 가른다.

乾坤离坎箴之情僞 我必行欺詐於人之機勢也 存心之戒也 艮兌震巽箴之情僞 人必行欺詐於我之機勢也 守身之戒也

乾坤离坎의 네 잠은 내가 남에게 사기를 행하는 기세(我必行欺詐於人)요, 艮兌震巽의 네 잠은 남이 나에게 사기를 행하는 기세(人必行欺詐於我)다. 같은 면에서 欺詐는 我→人으로도 人→我로도 흐른다. 면 위의 局은 치는 자이자 동시에 맞는 자다. 받은 것이 되돌아갈 길은 이미 面의 구조 안에 들어 있다. 더구나 欺詐는 본래 관계적이어서 한 방향으로 정착하지 못한다 — 내가 남을 속이는 기세는 남이 나를 속이는 기세와 같은 면을 나눠 가지므로, 一方의 欺詐는 언제나 그 역방향을 함께 불러낸다. 길이 있을 뿐 아니라, 그 길로 되돌아옴이 구조상 필연이다.

둘째는 治亂의 자리바꿈이다. 독행편은 적는다.

天下治則此輩畏正人而隱伏 天下不治則正人畏此輩而隱伏

천하가 다스려지면 굳은 局(此輩)이 정인(正人)을 두려워해 숨고, 어지러우면 정인이 굳은 局을 두려워해 숨는다. 같은 면에서 두 局은 治世와 亂世를 한 매듭씩 지나며 자리를 바꾼다. 2부의 互爲進退 — 한 局이 나아가면 맞선 局이 물러난다 — 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쌓인다. 낱낱의 進退가 누적되어 한 局이 오래 나아가고 다른 局이 오래 물러난 형국이, 곧 治世와 亂世라는 시대의 마디로 나타난다. 그 마디를 타고 進退는 한 바퀴를 돈다. 이것이 局回다. 面에서 주고받은 凌·傾·賊이 시간을 따라 돌아, 친 자가 맞고 맞은 자가 치는 자리로 되돌아온다. 다만 이 ‘되돌아옴’은 같은 매를 그대로 돌려받는 물리적 환류가 아니다. 친 자와 맞은 자의 자리가 고정되지 않고 治亂을 따라 뒤바뀌는 대칭적 재배치 — 누가 치고 누가 맞는가의 위치가 회전하는 것이다.

2부는 이 자리바꿈이 위치에 그치지 않음을 이미 적었다. 굳은 局은 높고 드러난 자에게는 사납게 굴고(恣橫肆毒) 낮고 천한 자에게는 참고 굽힌다(隱忍含垢) — 강약에 따라 자세가 통째로 뒤집히는 予奪之權이다. 그러므로 治亂이 강약을 뒤집으면, 어제 굽히던 자가 오늘 사나워지고 어제 사납던 자가 오늘 굽힌다. 局回의 한 바퀴는 누가 치고 맞는가의 위치뿐 아니라, 치는 자세와 굽히는 자세까지 함께 회전시킨다. 받고 되갚는 방향(8괘)에 강약이라는 변수가 끼어, 한 바퀴는 평면의 원이 아니라 자세가 뒤채는 입체의 회전이 된다.

2. 한 바퀴는 닫히지 않는다

그 한 바퀴는 어느 한쪽으로 완결되는가. 아니다. 面에서 보았듯 欺詐가 양방향으로 흐를뿐더러, 怨 또한 그러하다. 巽箴은 적는다 — 君子之怨恒在小人 小人之怨恒在君子(군자의 원망은 늘 소인에게, 소인의 원망은 늘 군자에게 있다). 欺詐도 怨도 양방향인 한, 어떤 일방적 우열도 한 방향으로 끝까지 쌓이지 못한다. 한쪽으로 기운 비대칭은 治亂의 마디에서 반드시 역전하고, 역전한 자리에서 다시 비대칭이 기운다. 局回는 닫히는 원이 아니라 닫히지 않는 회전이다.

이것이 1부의 마지막 명제와 만난다. 1부는 사단론의 한 구절로 굳은 局을 닫지 않았다.

鄙薄貪懦之淸濁濶狹萬殊之中有一同 衆人所以希聖也

비박탐나의 청탁과 활협이 만 갈래로 다르되, 그 가운데 하나의 같음 — 希聖의 가능성 — 이 있다. 1부는 이 열림을 局의 안쪽에서, 2부는 面의 益修에서 보았다. 3부는 그것을 局回의 회전에서 본다 — 한 바퀴가 끝내 완결되지 못하는 것, 그것이 곧 局이 닫히지 않았음의 다른 이름이다. 局은 굳었으되, 한 바퀴를 돌아도, 닫히지 않는다.

3. 한 가지 경계 — 되갚음으로 가지 말라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局回가 친 자와 맞은 자가 자리를 바꾸는 회전이라 하여, 이 글이 “받은 만큼 되갚아 자리를 뒤집으라"는 말로 읽혀서는 안 된다. 받은 것을 되돌려 갚는 것 — 흔히 報復이라 하는 — 으로는 한 바퀴가 결코 닫히지 않기 때문이다. 觀仁은 그 까닭을 적는다.

眞智不驕然後忮者讎者莫之凌也 眞義不伐然後軋者傾者莫之凌也

참된 智가 교만하지 않은 뒤에야 원수(讎者)가 능멸하지 못하고, 참된 義가 뽐내지 않은 뒤에야 기울이는 자(軋者·傾者)가 능멸하지 못한다. 원수를 막는 길은 더 센 힘이 아니라 不驕·不伐의 德이다. 되갚음으로는 凌을 끝낼 수 없다 — 더 센 힘은 더 센 怨을 부르고, 면은 한 바퀴를 또 돈다. 報復은 局回를 끊기는커녕 그 회전을 키운다. 더 큰 怨이 더 큰 비대칭을 낳아 다음 바퀴의 반경만 넓어질 뿐이다. 싸워 이겨도 그 局은 더 굳을 뿐이며, 局이 굳으면 이긴 자도 진 자도 없이 자기 자신만 상한다.

局回가 가리키는 것은 그러므로 상대와의 투쟁이 아니다. 받은 그 자리에서 한 바퀴를 더 돌리는 대신, 자기 안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동무가 반성잠에서 적은 그대로다.

詐心便發 未及行詐而反誠則學問也 學問之道無他 求其放心而已矣

거짓 마음이 막 일어나 아직 행하기 전에 誠으로 돌이키면 그것이 곧 학문이며,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놓친 마음을 되찾는 것(求其放心)일 뿐이다. 되갚을 怨이 솟는 그 순간, 면을 한 바퀴 더 돌리는 대신 그 마음을 안에서 되찾는 것 — 동무는 이를 克己復禮라 하고, 그르다 싶은 일에는 勿視勿聽勿言勿動이 上策이라 했다. 局回의 한 바퀴를 멈추는 것은 더 센 되갚음이 아니라, 자기에게로 돌아서는 한 걸음이다.

왜 안으로 돌아서는 것이라야 하는가. 받은 것을 밖에서 되갚는 길은 그 자리에서 局을 더 굳히기 때문이다. 한 번 되갚으면 상대도 굳고 나도 굳는다. 그런데 굳은 局은 본래 풀린 局과 한 몸이다 — 같은 局이 禮를 살려 흐르면 忠이 되고 버려 굳으면 鄙가 되듯, 鄙薄貪懦와 忠信廉解는 두 무리가 아니라 한 局이 굳은 쪽과 풀린 쪽이다. 풀린 쪽, 곧 忠信廉解는 어딘가 도달해 멈출 상태가 아니라 굳음이 풀려 흐르는 그 움직임 자체다. 그렇다면 局을 굳히는 일은 풀린 쪽으로 흐를 길을 스스로 막는 일이다. 되갚아 이겨도 그 局은 더 굳을 뿐, 흐름은 그만큼 멀어진다. 局回를 닫는 길이 되갚음일 수 없는 까닭이 여기 있다.

이 가름은 의학의 두 길과 포개진다. 한쪽은 병을 몸 밖의 한 원인으로 세우고 그것을 쳐 없애 질서를 회복하려 한다 — 어지러움의 뿌리를 밖에 두고 밖에서 바로잡는 길이다. 다른 한쪽은 본래 갖춰진 바른 단서가 가려졌을 뿐이라 보고, 그 가림을 안에서 풀어 제힘으로 되살아나게 한다 — 질서를 밖에서 세우지 않고 안에서 되찾는 길이다. 報復은 앞의 길이고 反誠은 뒤의 길이다. 동무의 의학이 사람마다 타고난 장부의 균형을 밖에서 교정하기보다 그 자신의 회복력을 따라 되돌리는 데 서 있는 것과, 局回를 되갚음이 아니라 안으로의 돌아섬으로 닫는 것은 같은 한 방향이다.

그리고 그 돌아섬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반성잠의 동무는 쉰일곱에 이르도록 詐心을 끝내 잊지 못한 채, 詐心이 일 때마다 그 자리에서 誠으로 돌이키기를 거듭한다 — 屢復屢失, 거듭 잃고 거듭 되찾는다. 완성은 한 번에 도달해 머무는 상태가 아니라, 詐心이 이는 그 찰나마다 더해지는 미세한 되돌림의 끝없는 누적이다. 局回가 끝내 닫히지 않기에, 그 되돌림을 매 바퀴 다시 더할 자리가 남는다. 닫히지 않음은 그래서 미완의 흠이 아니라, 돌이킴이 영원히 가능하다는 열린 조건이다.

닫으며 — 局·面·局回

세 부를 돌아본다. 1부는 局을 안쪽에서 보아 鄙薄貪懦가 닫힌 듯하나 닫히지 않은 心地임을, 2부는 그 局이 面에서 凌·傾·賊·掩으로 부딪히되 益修하는 맞은편에 막혀 한쪽으로 닫히지 않음을 보았다. 3부는 그 충돌이 治亂을 따라 한 바퀴를 도는 局回를 보았고, 그 한 바퀴가 끝내 완결되지 못한 채 자기에게로 돌아서는 자리(反誠)로 열림을 보았다.

세 부의 닫히지 않음은 같은 말의 반복이 아니라 층위의 축적이다. 1부의 닫히지 않음은 心地의 미완결 — 자기를 보는 눈이 끝내 다 닫히지 않음이고, 2부의 닫히지 않음은 관계의 미완결 — 한쪽의 침탈이 益修하는 맞은편에 막혀 완결되지 못함이며, 3부의 닫히지 않음은 시간의 미완결 — 한 바퀴가 끝내 완결되지 않는 회전의 열림이다. 局은 안에서도, 面에서도, 시간 속에서도 닫히지 않았다. 그 닫히지 않음이 鄙薄貪懦의 萬殊 가운데 있는 하나의 같음, 곧 希聖의 가능성이다.

局回가 마지막으로 말하는 것은 그러므로 누가 누구를 이겼는가가 아니라, 끝내 닫히지 않은 그 자리에서 자기 局을 다시 푸는 한 걸음이다. 局回는 돌아오는 운동이 아니라, 돌아오면서도 끝내 닫히지 않는 운동이다.

다만 局回는 늘 닫히는 데 성공하지 않는다. 反誠은 한 번에 이뤄지지 않아, 동무 자신이 쉰일곱에 이르도록 詐心을 끝내 잊지 못한다 했다 — 돌이킴은 屢復屢失, 거듭 잃고 거듭 되찾는 일이다. 그러면 끝내 돌아서지 못한 자리, 곧 行己不誠의 자리는 어디로 가는가. 면에서 남을 친 暴傷이 자기에게로 돌아서지 못한 채 제 안으로 돌아올 때, 그것은 더 이상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제 몸의 문제가 된다. 노여움이 肝을, 기쁨이 脾를, 슬픔이 腎을, 즐거움이 肺를 상한다 — 局回가 닫히지 못한 한 바퀴는 끝내 제 장부로 닫힌다. 관계의 의학이 몸의 의학으로 넘어가는 그 자리는, 局·面·局回라는 이 한 바퀴가 멈추는 곳이자 다음 자리가 시작되는 곳이다. 局의 바깥을 한 바퀴 돌아 다시 局으로 돌아온 지금, 남은 물음은 그 닫힌 바퀴가 몸에 새기는 病 — 鄙薄貪懦의 暴傷과 『東醫壽世保元』 病理의 만남이다.


참고문헌

  1. 李濟馬, 『格致藁』(反誠箴·巽箴·觀仁·獨行篇), 韓斗正 編, 咸興: 德興印刷所, 1940.
  2. 李濟馬, 『東醫壽世保元』(辛丑版, 四端論).
  3. 李濟馬, 『東醫四象初本卷』.
  4. 裵英淳, 「이제마의 인간론 — 衆人의 유형론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 50,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2, 323–357.
  5. 尹德泳·高炳熙, 「獨行篇에 나타난 鄙薄貪懦者에 대한 考察」, 『사상의학회지』 8(1), 1996, 57–74.
  6. 林炳學, 「『格致藁』의 事心身物과 『東醫壽世保元』의 天人性命과의 상관성 고찰」, 『퇴계학과 유교문화』 58, 2016.
  7. 李秀璟·高炳熙·宋一炳, 「四象醫學의 형성 과정에 관한 문헌적 고찰」, 『사상의학회지』 10(1), 1998, 41–54.

최장혁 | 한의사 · 동제당한의원 원장 · 연구 방법: DJD 다중 문헌 교차 리서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