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제당 최원장의 溯源齋

鄙薄貪懦는 어디로 닫히는가 — 暴傷과 心地의 淸濁

· 최장혁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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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行篇 × 壽世保元 「局·面·局回」 三部作 그 다음 · 第四部 〔暴傷 — 한 바퀴가 몸에 새기는 것〕

들어가며

「局·面·局回」 세 부는 한 바퀴를 그리고 닫혔다. 1부는 굳은 局을 그 안쪽에서 보아 鄙薄貪懦가 욕망이 큰 자가 아니라 자기 심지조차 밝게 보지 못하는 봉쇄의 자임을 보았고, 2부는 그 局이 다른 局과 맞닿는 面에서 凌·傾·賊·掩으로 남을 치되 益修하는 맞은편에 막혀 한쪽으로 닫히지 않음을 보았으며, 3부는 그 충돌이 治亂을 따라 한 바퀴 도는 局回가 끝내 완결되지 못한 채 자기에게로 돌아서는 자리, 곧 反誠으로 열림을 보았다.

그러나 反誠은 한 번에 이뤄지지 않는다. 동무 자신이 쉰일곱에 이르도록 詐心을 끝내 잊지 못한다 했으니, 돌이킴은 屢復屢失 — 거듭 잃고 거듭 되찾는 일이다. 그러면 끝내 돌아서지 못한 자리, 곧 行己不誠의 자리는 어디로 가는가. 3부는 그 물음을 한 문장으로 열어 두고 닫혔다 — 면에서 남을 친 暴傷이 자기에게로 돌아서지 못한 채 제 안으로 돌아올 때, 그것은 더 이상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제 몸의 문제가 된다. 관계의 의학이 몸의 의학으로 넘어가는 그 자리가, 본고의 출발점이다.

본고의 논지는 한 줄로 선다 — 鄙薄貪懦가 몸을 상하는 길은 비유가 아니라 기전(機轉)이며, 동무는 그 기전을 마음의 청탁(淸濁)에서 출발해 한 단계씩 신체의 특정 부위로 좁혀 내려간다. 이 글은 그 내려감의 순서를 그대로 따라간다. 場에서 받은 자극이 어떻게 心地의 문턱을 지나 性과 情으로 갈리고, 性과 情이 어떻게 表와 裏로 갈리며, 表裏가 어떻게 체질이 정한 부위에서 몸을 상하는가. 동무가 易象이 아니라 몸의 생리로 이 길을 그렸다는 것이, 이 글이 끝까지 붙드는 한 가지다.

1. 局回가 닫히지 못한 자리

局回의 한 바퀴는 면에서 받은 것이 시간을 따라 제자리로 돌아오는 운동이다. 3부가 보였듯, 그 돌아옴은 두 길로 닫힐 수 있다. 하나는 反誠 — 詐心이 일 때마다 그것이 행위로 터지기 전에 자기에게로 돌아서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그 돌아섬에 실패한 자리, 곧 行己不誠이다. 反誠으로 닫히면 局은 다시 풀려 흐르지만, 行己不誠으로 닫히면 한 바퀴는 갈 곳을 잃는다.

갈 곳을 잃은 한 바퀴가 어디로 가는지를, 초본권은 정확히 적어 둔다. 동무는 喜怒哀樂이 暴傷하는가 아닌가로 사람을 넷으로 가른다.

聖人之喜怒哀樂不暴傷者 行其性而知人明知之故也 賢人之喜怒哀樂猶暴傷者 知人不明之故也 不肖人之喜怒哀樂毎暴傷者 知人未賞全味而行己不誠之故也 修練人之喜怒哀樂不暴傷者 愛身絶欲畏人遠遁之故也

성인은 暴傷하지 않고(不暴傷), 현인은 그래도 暴傷하며(猶暴傷), 불초인은 매양 暴傷하고(毎暴傷), 수련인은 暴傷하지 않는다. 같은 不暴傷이라도 성인과 수련인은 그 까닭이 다르다 — 성인은 자기 성을 행하고 사람을 밝게 알아서(行其性·知人明) 暴傷하지 않으나, 수련인은 몸을 아끼고 욕심을 끊으며 사람을 두려워해 멀리 피함(愛身絶欲·畏人遠遁)으로써, 곧 관계를 끊음으로써 暴傷을 면한다. 暴傷이 관계의 사건임이 여기서 드러난다 — 관계를 끊으면 暴傷도 없다.

본고가 주목하는 자리는 불초인이다. 불초인은 곧 鄙薄貪懦다. 그가 매양 暴傷하는 까닭을 동무는 둘로 적는다 — 知人未賞全味(사람을 온전히 알지 못함)와 行己不誠(자기를 행함이 성실하지 못함)이다. 이 두 까닭은 「局·面·局回」가 이미 그린 것과 정확히 포개진다. 知人의 미숙은 2부가 본 안공(眼孔)의 왜곡 — 청한 것을 탁하게 읽고 탁한 것을 청하게 읽는 광학의 어긋남이고, 行己不誠은 3부가 본 反誠의 실패 — 詐心이 일 때 돌아서지 못함이다. 1부가 본 봉쇄, 2부가 본 면의 침탈, 3부가 본 한 바퀴의 미완결이, 4부에 와서 불초인 暴傷의 두 원인으로 다시 묶인다.

여기서 두 원인이 단순한 병렬이 아님을 분명히 해 둔다. 둘은 시간의 위상이 다르다. 知人의 실패는 감정이 발하기 이전의 일이고, 行己不誠은 감정이 발한 이후의 일이다. 뒤에서 보겠지만 乾箴은 知人이 喜怒哀樂의 未發而中, 곧 발하기 전에 中에 머무는 조건임을 적고, 反誠箴은 詐心이 이미 발한 뒤 그것이 행위로 터지기 전에 거두어들이는 일을 적는다. 그러므로 불초인의 두 결손은 한 사건의 앞뒤다 — 知人未賞은 발하기 이전의 문턱이 무너짐(未發의 붕괴)이고, 行己不誠은 발한 이후의 회수에 실패함(已發의 미수습)이다. 발하기 전에 中에 들지 못하고, 발한 뒤에 거두지도 못하니, 暴傷은 그 앞뒤가 함께 무너진 자리에서 비로소 매양 일어난다. 이 이중의 붕괴가 3절에서 心地의 문턱으로 다시 그려질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분명히 해 둔다. 知人은 초본권만의 별난 어휘가 아니라 獨行篇 그 자체의 서두 개념이다. 獨行篇은 篇名을 풀며 적는다 — 好而知其惡則中立而不倚, 惡而知其美則和而不流, 이런 자라야 절로 獨行하며, 獨行하는 자는 不動心한다. 그리고 그 不動心의 조건을 「知人然後正心 不動心之理」로 못 박는다. 知人이 곧 獨行篇 전체를 꿰는 축이다. 그러므로 불초인의 知人未賞이라는 진단은 獨行篇 바깥에서 빌려 온 것이 아니라, 獨行篇이 처음부터 말해 온 知人의 실패가 暴傷이라는 의학적 귀결로 닫히는 자리다.

※ 賞 字 교감 — 「知人未賞全味」의 賞은 코퍼스 원문 표기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문맥상 “일찍이 온전히 맛본 적 없다"는 未嘗으로 새기는 편이 자연스러우나, 嘗과 賞은 통용된 예가 있어 단정하지 않는다. 韓斗正本 실물 대조는 후고로 미룬다.

2. 외부는 다양해도, 局이 받는다

暴傷이 관계의 사건이라면, 그 사건의 첫 변수는 무엇인가. 밖에서 들어오는 자극의 종류인가, 아니면 그 자극을 받는 안쪽인가. 「場이 役을 配定한다 — 『格致藁』 八卦箴의 關係力動 構造」(溯源齋, 2026)는 이미 그 답의 한쪽을 그려 두었다 — 두 局이 부딪혀 생기는 場이 각자에게 역(役)을 씌우되, 그 역을 실제로 받아 내는 것은 바깥이 아니라 내 局이다. 坤箴의 한 구절이 그 받음의 능동성을 적는다.

我有强力 人必趁我

내게 강한 힘이 있으면 남이 반드시 나를 좇는다 — 관계의 형세는 바깥이 일방으로 던지는 것이 아니라 내 局이 먼저 세운 자리에서 결정된다. 같은 자극이라도 어떤 局에 닿느냐에 따라 무엇이 흔들리는지가 갈린다. 그러므로 暴傷의 1차 결정자는 자극의 다양성이 아니라, 그 자극을 받는 局의 형세다.

다만 이것이 외부를 지운다는 말은 아니다. 밖에서 닿는 자극이 없으면 발동 자체가 없다 — 暴傷은 어디까지나 관계의 사건이라, 홀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수련인이 사람을 멀리 피함(畏人遠遁)으로 暴傷을 면한 것이 그 증거다. 외부는 발동의 방아쇠(觸)이되, 그 방아쇠가 당겨졌을 때 무엇이 발동되는가를 정하는 것은 안쪽의 局이다. 외부가 있어야 일이 일어나지만, 무엇이 일어나는지는 안쪽이 정한다 — 같은 모욕, 같은 상실이라도 그것이 어느 감정을 건드리는가는 그 자극을 받는 局에 달려 있다.

이 점은 「機勢取象과 接觸面 — 『格致藁』 「反誠箴」 八卦의 再解釋」(溯源齋, 2026)이 반성잠의 여덟 잠을 읽으며 세운 결론과 한 줄로 이어진다 — 반성잠의 팔괘는 場에 입력되는 항이 아니라 場에서 빚어지는 결과다. 곧 어떤 기세가 일어나는가는 바깥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두 局이 맞물려 빚어내는 산물이다. 暴傷도 그렇다. 다음 절이 보일 것은, 그렇게 局이 받아 흔들린 감정이 두 갈래로 — 性으로 머물거나 情으로 터지거나 — 갈리는 그 문턱이다.

3. 心地의 淸濁이 性과 情을 가른다

같은 자극이 局에 닿아 한 감정을 흔든다 하자. 그 흔들림은 어디로 가는가. 여기에 본고의 심장이 있다. 미리 한 줄로 세워 둔다 — 心地의 淸濁이란, 흔들린 감정의 속도(急한가 緩한가)와 위상(未發에 머무는가 已發로 터지는가)을 함께 정하는 문턱이다. 1절에서 본 이중의 붕괴, 곧 未發에 들지 못함과 已發을 거두지 못함이, 이 한 장치의 두 얼굴이다. 이 문턱이 무엇과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 두 축을 먼저 갈라 둔다.

체질은 배선(配線)이다. 어떤 감정이 性으로 향하고 어떤 감정이 情으로 향하는지는 체질이 정한다. 사단론은 적는다 — 太陽人은 哀가 性이고 怒가 情이며, 少陽人은 怒가 性이고 哀가 情이고, 太陰人은 喜가 性이고 樂이 情이며, 少陰人은 樂이 性이고 喜가 情이다. 이 배선은 천품으로 불변한다. 어느 감정이 性의 자리에, 어느 감정이 情의 자리에 놓이는가는 바꿀 수 없다.

心地의 淸濁은 문턱(閾)이다. 그 배선에 자극이 닿을 때, 性의 자리에 머무느냐 情의 자리로 넘어가느냐를 가르는 것이 心地의 淸濁이다. 사단론이 두 축을 나란히 적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 太少陰陽之臟局短長은 네 다름 속에 하나의 큰 같음이 있어 성인과 중인이 한가지이나(臟局은 불변의 틀), 鄙薄貪懦之心地淸濁은 네 다름 속에 만 가지 다름이 있어 성인과 중인이 만 갈래로 갈린다(心地는 가변의 정도). 배선은 같아도, 그 배선에 자극이 닿을 때 어디까지 가느냐는 心地가 정한다.

이 문턱의 작동을 동무는 세 자리에서 그린다. 첫째, 廣濟說의 慟心이다.

太陰人恒有慟心 慟心寧靜則居之安資之深而造於道也 慟心益多則放心桎梏而物化之也

같은 慟心이라도 그것이 寧靜에 머물면(寧靜則) 도(道)에 이르고, 더 많아져 넘치면(益多則) 방심(放心)에 속박되어 물화(物化)한다. 자극이 같아도 머무느냐 넘치느냐가 갈리며, 그 갈림이 道와 物化라는 정반대의 귀결을 낳는다. 둘째, 같은 갈림을 동무는 慾心과 義心의 대비로 적는다.

以慾心而喜者 急喜而必傷 以義心而喜者 緩喜而不傷 凡人皆然

같은 喜라도 慾心으로 기뻐하면 급하게 기뻐(急喜) 반드시 상하고, 義心으로 기뻐하면 느리게 기뻐(緩喜) 상하지 않는다 — 모든 사람이 그러하다(凡人皆然). 여기서 상함과 상하지 않음을 가르는 것은 감정의 종류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마음에서 나와 어떤 속도로 가는가다. 같은 哀에 대해서도 동무는 같은 대구를 둔다 — 慾心으로 슬퍼하면 급하게 슬퍼 반드시 상하고, 義心으로 슬퍼하면 느리게 슬퍼 상하지 않는다. (※ 이 대비를 동무는 喜와 哀의 두 자리에서 명문으로 적었다. 怒와 樂에 대해서도 같은 구조가 성립하리라 짐작되나, 본고는 원문이 명시한 喜·哀에 한정해 인용한다.) 셋째, 反誠箴이 그 문턱을 넘지 않는 순간을 적는다.

詐心便發 未及行詐而反誠則學問也

詐心은 곧 발한다(詐心便發) — 마음의 동요 자체는 막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행위로 터지기 전에(未及行詐) 돌아서면(反誠) 그것이 곧 배움이다. 자극은 발하되 行詐로 넘어가기 전에 빠지는 것, 이것이 心地가 淸한 상태다.

세 자리가 같은 한 가지를 말한다 — 心地가 淸하면 자극에 性은 動하되 寧靜에 머물러 情으로 터지지 않고, 濁하면 性에 머물지 못해 情으로 넘친다. 곧 心地의 淸濁이 가르는 것은 두 감정 중 하나를 골라 배당하는 일이 아니라, 흔들린 그 감정이 性의 자리에 머물러 멈추느냐 아니면 머물지 못하고 情으로 넘어가느냐다. 性과 情은 체질이 이미 배선해 둔 두 자리이고, 心地는 그 사이의 문턱에서 머묾과 넘침을 정한다.

여기서 세 가지 오독을 미리 막아 둔다.

첫째, 性이 動하는 것 자체는 病이 아니다. 心地가 淸하다 하여 자극에 초연한 것이 아니다. 性은 미발(未發)이지 무(無)가 아니어서, 살아 있는 한 자극에 반드시 動한다 — 慟心이 0이라면 「居之安資之深」의 깊이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 동무가 경계한 것은 動이 아니라 過度다.

恒戒哀怒之過度 不可强做喜樂虛動不及

哀怒의 過度를 항상 경계하되, 喜樂을 억지로 만들어(强做) 헛되이 動하게(虛動) 하지 말라. 動을 없애라는 것이 아니라 過度를 경계하라는 것이며, 억지로 안 動하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헛된 動이라 더 나쁘다. 性의 動을 0으로 만드는 것은 동무의 목표가 아니다. 이 점이 부동심(不動心)을 목표로 두는 길과 갈린다 — 反誠의 不動心조차 詐心은 발한다. 동요가 안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行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 그 문턱을 넘지 않음은 참음이 아니라 상(相)의 전환이다. 情으로 터질 것을 힘으로 누르는 것(强做)은 동무가 금한 바다 — 억지로 누르면 헛되이 動하여 안에서 곪으니, 이것이 곧 물화(物化)요 질곡(桎梏)이다. 反誠은 누름이 아니다. 그것은 情(裏)으로 떨어지기 전에 性(表)의 결로 흘려보냄이다 — 같은 哀라도 哀情(체념과 남탓)으로 떨어지지 않고 哀性으로 펴는 것이다. 끓는 물의 뚜껑을 누르는 것이 참음이라면, 불을 줄이는 것이 反誠이다. 초본권은 이 누르지 않음을 덕(德)이자 절(節)로 적는다 — 旣發而不强揠者, 곧 이미 발한 것을 억지로 당기지 않는 자라야 성실의 덕이며 절도에 맞는다 하고, 억지로 당겨 크게 만들면(强揠而大做) 무익할 뿐 아니라 도리어 해롭다(非徒無益而又害之) 했다. 그리고 이 돌이킴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 屢復屢失, 동무가 쉰일곱에 이르도록 詐心을 잊지 못했듯, 매 순간 거듭되는 일이다.

셋째, 그러므로 心地의 淸濁은 性과 情 그 자체가 아니다. 心地의 淸濁은 가변하는 정도(萬殊)이고, 性과 情은 감정의 위상(미발과 이발)이다. 전자가 후자의 문턱을 정하는 것이지, 청탁의 정도가 곧 성정 자체인 것은 아니다. 이 둘을 한데 뭉개면, 心地를 닦는 일과 감정을 없애는 일이 혼동되어, 동무가 한사코 경계한 「虛動不及」으로 떨어진다.

이 문턱의 자리를 獨行篇은 그 자체의 언어로도 못 박아 둔다. 乾箴이 적는다.

知天然後喜怒哀樂已發而節也 知人然後喜怒哀樂未發而中也

하늘을 안 뒤에야 喜怒哀樂이 이미 발하여 절도에 맞고(已發而節), 사람을 안 뒤에야 喜怒哀樂이 아직 발하지 않아 중(中)에 든다(未發而中). 이어 동무는 그 知人이 무엇을 아는 것인지 적는다 — 천하 인심의 악욕(惡慾)을 통지(洞知)한 뒤에야 未發而中이라 했다. 곧 知人이란 사람의 악욕을 꿰뚫어 봄이고, 그것이 喜怒哀樂을 발하기 전에 中에 머물게 하는 직접 조건이다. 1절에서 본 이중의 붕괴가 여기서 닫힌다 — 知人이 未發而中의 조건인데 불초인은 그 知人에 미숙하여(未賞全味) 발하기 전에 中에 들지 못하고, 그렇게 터진 것을 反誠으로 거두지도 못한다(行己不誠). 乾箴의 知人→未發而中과 反誠箴의 未及行詐→反誠은 心地라는 한 문턱의 앞면과 뒷면이며, 그 둘이 함께 무너진 자리가 곧 불초인의 暴傷이다.

4. 性이면 表, 情이면 裏 — 그리고 부위

心地의 문턱을 넘어 性에 머물거나 情으로 터졌다 하자. 그 둘은 몸에서 서로 다른 곳으로 간다. 동무는 性과 情이 향하는 방향을 表와 裏로 가른다. 「太陽人內觸小腸病論」이 그 방향을 명문으로 적는다.

太陽人 哀心深着則傷表氣 怒心暴發則傷裡氣

태양인이 哀心(그의 性)에 깊이 잠기면 表氣를 상하고, 怒心(그의 情)이 폭발하면 裡氣를 상한다. 같은 글에서 동무는 나머지 세 체질에도 같은 구조를 둔다 — 少陽人은 怒性이 口膀胱氣를, 哀情이 腎大膓氣를 상하고, 少陰人은 樂性이 目膂氣를, 喜情이 脾胃氣를 상하며, 太陰人은 喜性이 耳腦顀氣를, 樂情이 肺胃脘氣를 상한다. 性氣는 表로, 情氣는 裏로 — 性과 情의 갈림이 곧 表와 裏의 갈림이다.

性氣가 表로 가는 까닭을 사단론은 그 방향성으로 적는다. 性氣는 활산(闊散)하여 밖으로 흩어지고(遠散), 情氣는 촉급(促急)하여 안으로 부딪힌다. 太陽人의 哀性이 활산하면 기가 폐에 주입되어 폐가 더 굳세지고(哀性闊散則氣注肺而肺益壯), 怒情이 촉급하면 기가 간을 격동하여 간이 더 깎인다(怒情促急則氣激肝而肝益削). 性은 밖으로 펴지는 운동이라 表로, 情은 안으로 몰리는 운동이라 裏로 가는 것이다.

여기서 4부의 결정적 가드를 둔다 — 表와 裏는 경중(輕重)의 축이 아니라 위치(位)의 축이다. 性(表)이 곪는 속도는 情(裏)보다 느리다(緩喜而不傷의 緩). 그러나 곪는 속도가 느리다 하여 그 病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어느 쪽이 본병(本病)인가는 곪는 속도가 아니라 체질이 어느 쪽을 급소로 타고났는가가 정한다. 태양인은 表가 오히려 본병이다. 「太陽人內觸小腸病論」이 그 表病을 적는다 — 哀心深着이 表氣를 상해 생기는 解㑊은 상체는 멀쩡하나 하체가 풀려 걷지 못하는 태양인 요척병의 太重證이며, 그 치법으로 五加皮壯脊湯을 들고, 무엇보다 深哀와 嗔怒를 경계하라(戒哀遠怒) 한다. 곧 태양인에게는 性(哀)이 表를 상하는 그 길이 가장 위중하다.

이 가드가 4부에서 결정적인 까닭은 鄙의 체질에 있다. 鄙는 태양인이다(초본권 체질 배속). 태양인에서는 性(哀)이 表로 가 本病·重證이 되고, 情(怒)이 裏로 가는 쪽이 오히려 二次다 — 性·表가 무겁고 情·裏가 가벼운, 일반의 통념과는 뒤집힌 자리다. 그러므로 한 문장으로 못 박아 둔다 — 性이 表로 간다는 이유로 가볍다 여기는 순간, 태양인에서는 곧바로 치명적 오독이 된다. 鄙者의 暴傷을 表 쪽이라 가볍게 읽는 것은, 동무가 가장 위중하다 한 자리를 정반대로 읽는 일이다. “性→表→가벼움"이라는 도식은 鄙者에게서 즉시 깨진다.

그리하여 자극이 몸에서 닿는 최종 부위는 두 겹의 교점으로 정해진다. 한 겹은 체질이 정한 약한 장부 — 태양인은 간이 작고, 소양인은 신이 작고, 소음인은 비가 작고, 태음인은 폐가 작아, 그 작은 장부가 급소다. 다른 한 겹은 性氣가 가는 表의 부위인가 情氣가 가는 裏의 부위인가다. 같은 체질이라도 性으로 무너지는 부위와 情으로 무너지는 부위가 갈린다 — 태양인이라도 哀性에 잠겨 무너지는 表(요척)와 怒情이 터져 무너지는 裏(소장)가 서로 다른 자리인 것이다. 體質의 약장(藏)과 性情의 위상이 만나는 그 교점에서, 추상의 場은 비로소 몸의 한 부위로 착지한다.

여기까지가 場에서 받은 것이 몸의 특정 자리로 좁혀 내려오는 일반의 길이다. 場에서 局이 받고, 心地의 淸濁이 性과 情을 가르고, 性과 情이 表와 裏로 갈리며, 表裏가 체질이 정한 부위와 만난다. 그러나 이 길을 한 번 지난다 하여 곧 病이 되는 것은 아니다. 暴傷의 暴은 본래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등락의 거듭됨이다 — 頻起頻伏, 屢得屢失, 거듭 일었다 거듭 꺼지는 그 반복이 暴의 실체다. 性에 머물지 못하고 情으로 거듭 떨어지기를 되풀이할 때, 그 반복이 곧 한 장부로 쏠리는 편향을 고착시키고, 그 고착이 마침내 病의 형식으로 굳는다. 단발의 흔들림이 性과 情으로 갈리는 것이 지금까지의 길이라면, 그 갈림이 한쪽으로 거듭 쌓여 몸에 새겨지는 것이 다음 자리다. 다음 절에서 볼 것은, 이 반복이 불초인 — 鄙薄貪懦 — 의 몸에서 어떤 네 단계를 밟아 무너지는가, 그리고 그 무너짐이 어떤 몸의 증상으로 닫히는가다.


5. 불초인의 暴傷 — 회로가 무너지는 방향

앞 절은 단발의 흔들림이 場에서 받아져 心地의 문턱을 지나 性과 情으로 갈리고, 그 갈림이 表와 裏로, 다시 체질이 정한 부위로 좁혀 내려오는 길을 그렸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그것은 아직 病이 아니다. 한 번 슬퍼하고 한 번 노여워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있고, 그 자체로 장부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病은 그 흔들림이 거듭될 때 비로소 새겨진다. 이 절은 그 거듭됨이 불초인 — 鄙薄貪懦 — 의 몸에서 어떤 네 단계를 밟아 무너지는가를 본다.

무너짐의 출발 — 같은 회로를 거꾸로 읽기

한 가지를 먼저 짚어 둔다. 동무가 그린 몸은 본래 무너지라고 지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잘 도는 회로다. 이기복(2014)이 정밀하게 복원했듯, 「장부론」의 四焦 생리는 완성의 생리학이다 — 水穀의 기운이 위완에서 대장까지 흐르며 네 焦에 고루 수포되고, 귀·눈·코·입을 멀리·크게·널리·깊이 쓰면 精神氣血이 살고(深遠廣大則生), 폐·비·간·신으로 學·問·思·辨을 바르게 쓰면 津液膏油가 찬다(正直中和則充). 기운이 고루 흐르는 그 몸이 곧 절세대인의 몸이다. 이기복은 이 회로가 오행 같은 우주론이 아니라 사람이 세상과 관계 맺는 능동적 활동에서 추동된다고 보았다 — 이 점에서 그의 독법은 본고가 1절부터 따라온 길, 곧 場이 몸을 추동한다는 전제와 정확히 만난다.

본고는 이기복이 세운 그 완성의 四焦 위에서, 그가 다루지 않은 한 가지를 묻는다 — 그 회로가 거꾸로 돌면 어떻게 되는가. 이기복의 §3.2.4는 철저히 잘 도는 몸만 본다. 같은 哀라도 緩하면 폐를 채우는 동력이 되지만, 急하면 그 폐를 깎는 흉기가 된다는 양면 가운데, 그는 채우는 쪽만 그렸다. 暴傷도, 心地의 문턱도, 放心桎梏도 그 절에는 없다. 그러나 같은 생리 구조가 무너지는 방향으로도 돌 수 있다면, 완성의 회로를 그린 바로 그 「장부론」이 무너짐의 회로도 함께 품고 있는 셈이다. 4부가 보려는 것이 그 역방향이다. 이기복이 四焦의 순방향(완성)을 복원했다면, 본고는 그 역방향(暴傷)을 격치고 獨行篇과 잇는다 — 같은 회로의 반대 운동이다.

네 단계 — 鄙者(태양인)를 따라

무너짐의 길을 한 사람에서 끝까지 따라가 본다. 鄙는 태양인이다(1절·초본권 배속). 태양인의 약한 장부는 간이고, 그의 情은 怒다. 怒情이 촉급하면 기가 간을 격동하여 간을 깎는다는 것(怒情促急則氣激肝而肝益削)은 4절에서 보았다. 이제 그 怒가 거듭 일었다 거듭 꺼질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첫째, 감정의 등락이 부위의 등락으로 옮겨 적힌다. 초본권은 적는다.

頻起怒而頻伏怒則兩脇暴盛而暴衰也

자주 노여워했다 자주 거두면(頻起怒而頻伏怒) 양 옆구리가 갑자기 성했다 갑자기 쇠한다(兩脇暴盛而暴衰). 여기서 暴傷의 暴이 무엇인지가 드러난다 — 그것은 감정의 종류가 아니라 등락 그 자체다. 노여움이 한 번 깊은 것이 아니라, 일었다 꺼지기를 자주 되풀이하는 그 진폭이 옆구리를 물리적으로 성하게 했다 쇠하게 한다. 마음의 등락이 몸의 등락으로 그대로 옮겨 적히는 것이다. 이 옮겨 적힘이야말로 心因이 身으로 건너가는 실제 자리다 — 동무는 마음이 몸을 “상하게 한다"고 추상으로 말하지 않고, 어느 부위가 어떻게 물리적으로 요동치는가로 적었다.

둘째, 요동치는 부위가 그 자리의 장부를 깎는다.

兩脇暴盛而暴衰則肝血傷也

양 옆구리가 갑자기 성했다 쇠하면 간의 血이 상한다(肝血傷). 옆구리는 간이 자리한 곳이니, 그 부위의 급격한 요동이 곧 간의 血을 깎는다. 그런데 태양인에게 간은 본래 작은 장부, 곧 급소다. 이미 작은 간이 怒情의 거듭된 暴으로 더 깎이는 것이니, 같은 暴傷이라도 태양인의 간에서 가장 치명적이다. 동무가 喜怒哀樂 넷에 각각 장부를 짝지은 것(怒→肝血傷, 喜→脾氣傷, 哀→腎精傷, 樂→肺神傷)은 보편의 대응이지만, 그 보편이 한 체질에서 가장 깊이 파이는 자리는 그 체질의 약장이다.

셋째, 깎인 장부가 말단의 조직에까지 미친다. 동무는 장부의 손상을 거기서 멈추지 않고 몸 가장 바깥의 조직으로 잇는다.

肝部衰弱則筋脉酸

간이 쇠약해지면 힘줄과 맥이 시큰거린다(筋脉酸). 같은 자리에서 동무는 네 장부를 모두 말단에 잇는다 — 폐가 쇠약하면 피모가 타들고(皮毛焦), 비가 쇠약하면 살결이 차가워지고(肉理寒), 신이 쇠약하면 골수가 마른다(骨髓枯). 곧 마음에서 시작한 한 줄기가 힘줄이 시리고 살이 차갑고 골수가 마르고 피부가 타는, 손으로 만져지는 몸의 증상으로 닫히는 것이다. 暴傷을 한갓 감정 다스림의 수양론으로만 읽는 통념이 여기서 갈린다 — 동무가 그린 것은 마음의 동요가 가시적 신체 증상으로 귀결되는 한 기전이다.

넷째, 그 손상이 더 깊어지면 神에까지 미친다. 동무는 장부의 손상을 둘로 층지어 본다. 지금까지의 暴傷은 血氣精神을 상하는 1차의 손상이다. 그 위에 또 한 겹이 있다 — 감정이 단지 요동치는 데 그치지 않고 끝까지 치달아 절도를 잃으면(極), 더 깊은 곳인 魂魄志意가 상한다.

怒極者 怒之不勝其忿而悲哀動中則肝魂傷也

노여움이 극에 이른 자는(怒極者) 그 분을 이기지 못해 슬픔이 안에서 동하여 간의 魂이 상한다(肝魂傷). 喜가 극에 이르면 비의 魄이, 哀가 극에 이르면 신의 志가, 樂이 극에 이르면 폐의 意가 상한다. 등락(暴)이 血氣精神을 깎는 1차의 손상이라면, 무절제(極)는 그 장부에 깃든 神 — 魂魄志意 — 을 깎는 2차의 손상이다. 그리고 그 神이 막히는 자리에서 동무는 大病을 본다.

肝魂淫則恍惚作也

간의 魂이 방탕해지면 황홀(恍惚)이 일어난다. 같은 자리에서 동무는 네 神의 막힘을 네 大病에 짝짓는다 — 肺意阻則怔忡(폐의 意가 막히면 정충), 脾魄蕩則悅亂(비의 魄이 흔들리면 열란), 腎志促則健忘(신의 志가 촉급하면 건망). 鄙者(태양인)는 그의 약장인 간의 魂이 깎여 恍惚에 이르는 것이다.

이렇게 한 줄기가 끝까지 그려진다 — 怒情의 거듭된 暴이 옆구리를 요동시키고(①), 요동이 간의 血을 깎고(②), 깎인 간이 힘줄을 시리게 하고(③), 그 손상이 깊어져 간의 魂을 흔들어 마침내 恍惚에 이른다(④). 마음의 한 동요에서 시작한 길이, 몸의 가장 깊은 자리인 神의 病으로 닫힌다.

네 유형, 한 법칙

지금까지는 鄙者 한 사람을 따라갔으나, 鄙薄貪懦 넷은 각자 다른 장부에서 같은 사슬을 밟는다. 그리고 그 넷이 흩어지는 방식에는 한 법칙이 있다. 사단론은 적는다.

哀怒之氣逆動則暴發而並於上也 喜樂之氣逆動則浪發而並於下也 上升之氣逆動而並於上則肝腎傷 下降之氣逆動而並於下則脾肺傷

哀와 怒의 기가 거슬러 동하면 폭발하여 위로 몰리고(並於上), 喜와 樂의 기가 거슬러 동하면 낭발하여 아래로 몰린다(並於下). 위로 몰리면 간과 신이 상하고, 아래로 몰리면 비와 폐가 상한다. 곧 네 감정의 暴은 아무 장부나 무작위로 치는 것이 아니라 위아래의 방향을 따른다. 哀怒는 위로 올라 간·신을, 喜樂은 아래로 내려 비·폐를 친다.

이 방향 법칙 위에 鄙薄貪懦 넷을 얹으면, 넷의 무너짐이 정확히 두 갈래 대칭으로 갈린다. 鄙(태양인)는 怒情으로 간을, 薄(소양인)는 哀情으로 신을 치니 — 둘 다 위로 몰리는 갈래다. 貪(태음인)은 樂情으로 폐를, 懦(소음인)는 喜情으로 비를 치니 — 둘 다 아래로 몰리는 갈래다. 비박탐나의 자기파괴가 위(간·신)와 아래(비·폐)의 두 갈래로 대칭을 이루는 것이다. 네 유형이 각자의 약장에서 같은 네 단계를 밟되, 그 약장이 위에 있느냐 아래에 있느냐가 사단론의 방향 법칙으로 갈린다.

네 유형이 밟는 사슬을 한자리에 모으면 이렇다 — 鄙(태양·간)는 怒情이 옆구리를 흔들어 肝血을 깎고 힘줄을 시리게 하며 간의 魂이 흔들려 恍惚에 이르고, 그 표(表)의 자리에서는 哀性이 깊이 잠겨 解㑊이라는 요척병의 太重證으로 닫힌다. 薄(소양·신)은 哀情이 등골을 흔들어 腎精을 깎고 골수를 마르게 하며, 大便이 통하지 않아 가슴이 불같이 타는 자리로 간다(少陽人大便不通則胸膈必如烈火). 貪(태음·폐)은 樂情이 어깨를 흔들어 肺神을 깎고 피모를 타게 하며 폐의 意가 막혀 怔忡에 이른다. 懦(소음·비)는 喜情이 가슴을 흔들어 脾氣를 깎고 살을 차게 하며, 비의 운화가 무너져 설사가 그치지 않고 배꼽 아래가 얼음처럼 차가워진다(少陰人泄瀉不止則臍下必如氷冷). 넷이 서로 다른 감정으로 서로 다른 장부를 서로 다른 병증으로 무너뜨리되, 그 무너지는 길의 형식은 하나다 — 거듭된 暴이 약장을 깎아 제 몸으로 닫히는 그 길이다.

이로써 1절에서 던진 물음 — 돌아서지 못한 한 바퀴는 어디로 가는가 — 이 몸에서 답해진다. 鄙薄貪懦는 안공이 닫혀 사람을 온전히 알지 못하고(知人未賞, 2부), 反誠으로 돌아서지도 못하여(行己不誠, 3부), 情이 거듭 暴發하는 자리에 고착된 자다. 그리하여 그는 남을 친 그 暴傷을 자기 喜怒哀樂에서도 똑같이 일으켜, 면에서 남에게 보낸 暴이 局回로 돌아와 끝내 제 약장을 깎는다. 관계에서 시작한 한 바퀴가, 끝내 제 몸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닫히는 것이다.


6. 닫히지 않게 하는 일 — 神病과 恒寧靜

5절은 거듭된 暴이 약장을 깎아 마침내 神을 흔드는 자리까지 따라갔다. 鄙者의 간의 魂이 흔들려 恍惚에 이른다 했다. 그러나 동무가 神病을 그린 자리는 한 곳이 아니다. 초본권은 네 神의 막힘을 네 病에 짝지었고(第五統), 廣濟說은 그중 둘만을 大病으로 못 박았다. 이 둘이 어긋나는 자리에 4부의 마지막 매듭이 있다. 그리고 그 매듭을 푸는 것이 곧 동무가 처방한 단 하나의 약, 恒寧靜이다.

神病 — 第五統의 네 자리

먼저 神病의 전모를 초본권에서 본다. 第五統은 적는다.

肺意阻則怔忡作也 脾魄蕩則悅亂作也 肝魂淫則恍惚作也 腎志促則健忘作也

폐의 意가 막히면 정충(怔忡)이, 비의 魄이 흔들리면 열란(悅亂)이, 간의 魂이 방탕해지면 황홀(恍惚)이, 신의 志가 촉급하면 건망(健忘)이 일어난다. 네 장부에 깃든 神 — 意·魄·魂·志 — 이 저마다 막히고 흔들리고 방탕해지고 촉급해질 때, 각기 다른 大病이 일어난다. 5절에서 본 2층 손상의 종착이 여기다 — 등락(暴)이 血氣精神을 깎는 1차의 위에, 무절제(極)가 魂魄志意를 깎는 2차가 있고, 그 2차의 끝이 이 네 神病이다.

여기서 네 神病을 4부의 네 유형에 얹으면, 5절의 사슬이 마지막 칸까지 채워진다. 貪(태음·폐)은 폐의 意가 막혀 怔忡에, 懦(소음·비)는 비의 魄이 흔들려 悅亂에, 鄙(태양·간)는 간의 魂이 방탕해져 恍惚에, 薄(소양·신)은 신의 志가 촉급하여 健忘에 이른다. 네 유형이 각자의 약장에서 같은 사슬을 밟아, 끝내 그 약장에 깃든 神의 病으로 닫히는 것이다. 第五統은 그 네 닫힘을 한자리에 그려 둔 도식이다.

어긋남 — 廣濟說은 둘만 말한다

그런데 동무가 만년에 쓴 廣濟說은 이 네 자리를 그대로 잇지 않는다. 廣濟說은 네 체질이 항상 지니는 마음(恒心)을 적고, 그 마음이 넘칠 때 어디로 가는지를 적는데 — 거기서 大病에 이르는 길을 오직 둘에만 그린다.

太陰人恒有慟心 … 若慟心至於怕心則大病作而怔忡也 怔忡者太陰人病之重證也 少陽人恒有懼心 … 若懼心至於恐心則大病作而健忘也 健忘者少陽人病之險證也

태음인은 항상 동심(慟心)이 있어, 그것이 파심(怕心)에 이르면 大病이 일어나니 怔忡이요 태음인 병의 重證이다. 소양인은 항상 구심(懼心)이 있어, 그것이 공심(恐心)에 이르면 大病이 일어나니 健忘이요 소양인 병의 險證이다. 여기까지는 第五統과 어긋나지 않는다 — 怔忡은 태음인(폐)에, 健忘은 소양인(신)에, 두 자리가 정확히 같다. 그러나 나머지 둘에서 廣濟說은 멈춘다.

少陰人恒有不安定之心 不安定之心寧靜則脾氣卽活也 太陽人恒有急迫之心 急迫之心寧靜則肝血卽和也

소음인은 항상 불안정한 마음이 있어, 그것이 寧靜하면 비의 기운이 곧 살아난다(脾氣卽活). 태양인은 항상 급박한 마음이 있어, 그것이 寧靜하면 간의 血이 곧 조화된다(肝血卽和). 태음인·소양인에게는 그 마음이 넘쳐 大病에 이르는 길까지 그렸는데, 소음인·태양인에게는 그 마음이 寧靜할 때 장부가 살아나는 쪽만 적고, 넘쳐서 어떤 大病에 이르는지는 적지 않았다. 第五統이 네 자리를 모두 채운 데 비해, 廣濟說은 두 자리를 비워 둔 것이다.

이 비대칭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둔다 — 동무가 태양인·소음인에게 神病이 없다고 본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第五統에서 肝魂淫·脾魄蕩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태양인의 大病은 따로 있다 — 5절에서 본 解㑊, 곧 哀心深着이 表氣를 상해 생기는 요척병의 太重證이 그것이다. 소음인 역시 泄瀉不止·臍下氷冷이라는 제 大病을 따로 지닌다. 곧 태양인·소음인의 가장 위중한 자리는 神病(恍惚·悅亂)이 아니라 다른 병증에 있고, 廣濟說은 각 체질에서 임상적으로 가장 먼저 닥치는 大病을 든 것으로 보인다 — 태음인·소양인에게는 그것이 마침 神病(怔忡·健忘)이었고, 태양인·소음인에게는 그것이 神病 아닌 다른 자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고는 神病의 골격을 第五統의 네 배정으로 둔다. 廣濟說의 怔忡·健忘은 그 네 배정 가운데, 동무가 大病에 이르는 길까지 끝까지 그려 보인 두 사례다 — 神病의 전체를 둘로 줄인 것이 아니라, 넷 중 둘을 임상의 종착까지 따라가 예시한 것이다. 이 독법을 취하면 第五統(이론의 네 자리)과 廣濟說(임상의 두 예시)이 어긋나지 않고 층으로 포개진다. (※ 다만 이 어긋남을 동무 자신의 만년 개정 — 神病 네 배정을 임상에서 둘로 좁힌 자취 — 으로 보는 길도 있다. 그 서지적 판단은 본고의 범위를 넘으므로 별도의 자리로 미룬다.)

약은 하나 — 恒寧靜

네 神病이 모두 한 뿌리에서 온다면, 그 약도 하나다. 廣濟說의 네 구절을 다시 보면, 大病으로 가는 길과 갈리는 분기점이 모두 한 단어에 걸려 있다 — 寧靜이다. 慟心이 寧靜하면 道에 이르고(慟心寧靜則造於道), 넘치면 物化한다(慟心益多則放心桎梏而物化). 같은 마음이 寧靜에 머무느냐 넘치느냐가 道와 大病을 가른다. 이것은 3절에서 본 心地의 문턱과 정확히 같은 구조다 — 寧靜이 곧 그 문턱에 머묾이고, 넘침(益多)이 곧 문턱을 넘어 情으로 터짐이다.

그러면 어떻게 寧靜에 머무는가. 동무는 체질마다 다른 처방을 둔다.

太陰人察於外而恒寧靜慟心 少陽人察於內而恒寧靜懼心 太陽人退一步而恒寧靜急迫之心 少陰人進一步而恒寧靜不安定之心 如此則必無不壽

태음인은 밖을 살펴(察於外) 동심을 항상 寧靜하게 하고, 소양인은 안을 살펴(察於內) 구심을 寧靜하게 하며, 태양인은 한 걸음 물러서서(退一步) 급박한 마음을 寧靜하게 하고, 소음인은 한 걸음 나아가서(進一步) 불안정한 마음을 寧靜하게 하면 — 이와 같이 하면 반드시 장수하지 않음이 없다(如此則必無不壽). 네 체질이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마음을 다스리되, 그 다스림이 향하는 곳은 하나, 恒寧靜이다. 그리고 그 끝이 죽지 않음이 아니라 장수다 — 暴傷이 목숨을 깎는 길이라면, 恒寧靜은 그 깎임을 멈추어 천수를 채우는 길이다.

여기서 동무가 또 하나 보탠 처방이 본고의 처음과 끝을 잇는다.

太陽人恒戒怒心哀心 少陽人恒戒哀心怒心 太陰人恒戒樂心喜心 少陰人恒戒喜心樂心 如此則必無不壽

태양인은 항상 노심·애심을 경계하고, 소양인은 애심·노심을, 태음인은 낙심·희심을, 소음인은 희심·낙심을 경계하면 장수한다. 각 체질이 경계해야 할 두 마음이 곧 그 체질의 情과 性 — 태양인이라면 怒(情)와 哀(性) — 이다. 5절에서 본 그대로다. 태양인의 怒情은 裏(간)를 치고 哀性은 表(요척)를 치니, 그 둘을 함께 경계하라는 것은 곧 裏의 暴發과 表의 深着을 함께 막으라는 것이다. 廣濟說의 이 마지막 처방은, 사단론과 「太陽人內觸小腸病論」이 그린 性情-表裏의 길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그 입구에서 막는 처방인 셈이다.

局回로 돌아옴 — 反誠이 곧 恒寧靜

이로써 「局·面·局回」 세 부와 본부가 한자리에서 닫힌다. 3부는 局回의 한 바퀴가 反誠으로 닫히거나 行己不誠으로 닫히지 못함을 보았다. 反誠이란 詐心이 일 때 그것이 行詐로 터지기 전에 돌아서는 일이었다(詐心便發 未及行詐而反誠). 4부에 와서 보면, 그 反誠이 곧 의학의 언어로는 恒寧靜이다. 詐心이 발하되 行詐로 넘기지 않음과, 慟心이 動하되 寧靜에 머물러 物化로 넘기지 않음은, 같은 한 문턱에서 일어나는 같은 한 일이다. 反誠箴이 관계의 자리에서 그린 그 돌아섬을, 廣濟說은 몸의 자리에서 恒寧靜으로 다시 그렸다.

그리하여 鄙薄貪懦의 暴傷은 반대편에서 그 약을 얻는다. 그들이 매양 暴傷하는 까닭은 知人에 미숙하여 발하기 전에 中에 들지 못하고(未發의 붕괴), 行己不誠하여 발한 뒤에 거두지 못함(已發의 미수습)이었다. 恒寧靜은 그 두 자리를 함께 메우는 처방이다 — 察於外·察於內로 사람과 자기를 살펴 知人에 다가가는 것이 발하기 전의 약이고, 退一步·進一步로 한 걸음 물러서거나 나아가 마음을 寧靜에 두는 것이 발한 뒤의 약이다. 1절에서 본 두 결손이, 廣濟說의 두 처방으로 정확히 맞물려 메워진다.

局回가 끝내 닫히지 않는다는 것은, 3부에서는 한 바퀴가 완결되지 못함의 열림이었으나, 4부에 와서는 다른 뜻을 얻는다 — 暴傷의 한 바퀴가 제 장부로 닫히지 않도록 매번 돌이키는 일, 그 끝없는 恒寧靜의 되풀이가 곧 닫히지 않음이다. 反誠이 屢復屢失이듯(동무가 쉰일곱에 이르도록 詐心을 잊지 못했듯), 恒寧靜도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鄙薄貪懦의 萬殊 가운데 있는 하나의 같음 — 希聖의 가능성 — 은, 몸의 자리에서는 그 끝없는 돌이킴으로 천수를 채우는 가능성으로 나타난다. 닫히지 않은 그 자리에서 매번 제 마음을 寧靜으로 되돌리는 한 걸음, 그것이 局回가 마지막으로 말하는 것이자, 마음이 몸을 상하는 길에서 몸을 살리는 단 하나의 길이다.


남는 자리 — 사단칠정 별고

본고는 暴傷을 喜怒哀樂의 四情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동무의 감정론이 성리학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과 어디서 갈리고 어디서 만나는가는, 본고가 끝내 본격적으로 묻지 못한 자리다. 동무가 喜怒哀樂을 性과 情으로 가른 방식은 퇴계·고봉의 理發·氣發 구도와 같지 않고, 그렇다고 무관하지도 않다 — 그 거리를 재는 일은 격치고의 감정론을 조선 성리학사 안에 놓는 별도의 작업을 요한다. 이는 본고의 범위를 넘으므로, 易學派 정초 비판과 같은 자리, 곧 별고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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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혁 | 한의사 · 동제당한의원 원장 · 연구 방법: DJD 다중 문헌 교차 리서치